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사람의 아들-이문열-1994년판본 개정3판3쇄

by sapum 2022. 8. 22.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Son of man)’ 이란 표현을 들으면, 나처럼 금세 성경을 떠올리는 분들 적잖으실 것이다. 그런가 하면 작가 이문열의 동명 소설을 떠올릴 분들도 상당수일 것이라 생각한다.

< 사람의 아들 - 이문열 -1994 년판본 개정 3 판 3 쇄 >

나 역시 이문열 작가의 1994년판 본 개정판 33쇄의 책을 가지고 있다. 작가의 이 책에 대한 내용이야 인터넷 검색으로 얼마든 탐색이 가능하니 내용은 생략하기로 한다.

<사람의 아들-이문열-1994년판본 개정3판3쇄>

 

다만, 책 말미에 있는 [개정증보판을 내면서 남긴 작가의 말]에서 독자들도 그러했겠지만, 초판에 대한 가장 큰 불만은 (주인공들)이 찾아낸 <새로운 >의 모습을 확연히 드러내지 못한 점이었다.”라는 말에 이어, 이런 이유로 초판에서 뺐던 [쿠아란타리아]를 다시 삽입하고, 반기독교(反基督敎)적 행로의 끝에 주인공이 결국 다시 기독교로 회로(回路)한 이유를 보총했다고 설명한 부분만 차용하고자 한다.

<사람의 아들-이문열-1994년판본 개정3판3쇄>

 

매일 매시 당면한 삶에 끌려가노라면 바로 앞 내 구두코만 바라보다 자칫 놓치기 쉽지만, 실은 내 삶의 이유를 관통하는 매우 진중한 질문을 소설이란 장르를 통해 던졌다는 점에서 작가는 매우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 내가 이 책을 내 책장에서 빼내지 않고 가지고 있는 이유다.

<사람의 아들-이문열-1994년판본 개정3판3쇄>

그 묵직한 질문들의 큰 주제로는 선과 악’, ‘자유의지’-세부주제로는 선과 악의 경계 없이 우리에게 재난이 닥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와 같은 것들이 있다.

<사람의 아들-이문열-1994년판본 개정3판3쇄>

사실 이런 질문들은 우리 삶의 고비를 넘을 때나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때 쉽게 외면할 수 없는 질문인데, 이런 계기도 없이 질문에 접근하는 사람들은 현자이며 복된 사람들이다. 애석하게도 나는 전자에 속한다.

 

때문에 작가에게도 일정부분 모티브가 된 성경을 일독한 1인으로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탐색한 나의 여정을 차분히 전개해보려 한다.

 

순서는 아래와 같이 정했다.

 

성경 속 사람의 아들이란 표현이 사용된 곳과 의미

 

선과 악의 기준을 정할 권리

 

자유의지라는 탁월한 선물

 

무고한 사람들에게 닥치는 재난의 이유

 

조물주께서 아들 예수를 통해 마련하신 회복

 

 

성경 속 사람의 아들이란 표현이 사용된 곳과 의미

 

성경에서 사용된 人子-사람의 아들이란 표현이 예수를 가리키는 데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여호와께서는 예언자 에스겔을 90회 이상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르셨는데, 이것은 그가 큰 특권을 받았지만 땅의 사람에 불과하다는 점을 상기시키시므로 인간 대변인과 그 소식의 근원이신 가장 높으신 하느님을 두드러지게 대조한 표현으로 사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 사람의 아들이란 표현(80회 정도)이 사용되었을 때에는, 하느님의 아들이 유대인 처녀 마리아에게 수태되어 출생함으로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갈라디아서 4:4; 누가복음 1:34-36)어 진짜 인간으로서 육신이 되”(요한복음 1:14)셨음을 분명히 알리기 위한 표현이다. 다시 말해 예수는 이전에 천사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단순히 인간 몸으로 육화(물질화)한 것이 아니라, 인간 어머니를 통하여 실제로 사람으로 태어난 온전한 의미에서 인간의 아들이 된 것이란 의미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히브리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히브리서 2:5-9)에서 시편(8:4-6. 시편 144:3)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으로 적용할 수 있었다. 이 예언적 가 성취되도록 예수는 정말 천사들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낮추어져: 신세계역)” 실제로 멸성인 땅의 사람의 아들로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신 뒤, 자신을 부활시키신 아버지 여호와에 의해 영광과 영화로 면류관을 쓸 수 있게 되셨다.히브리서 2:8, 9, 14; 빌립보서 2:5-9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이라는 명칭은 예수 그리스도가 죄와 죽음의 속박에서 인류를 구속(救贖)할 능력과 대속주(대속물)로서(마태복음 20:28) 상응하는 값의 자격을 지닌 분임을 표현하는 것이다. , 에덴에서 반역하기 전의 아담(고린도 전서 15:45)과 동일한 조건인 완전한 인간이 되셨음을 알리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조물주와 피조물,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게 하신분과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신 분, 대속물의 가치를 받으신 분과 대속물이 되신 분의 관계로 성경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삼위일체신앙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요한복음 14:28)

 

선과 악의 기준을 정할 권리

 

이문열 작가의 책 뿐 아니라 많은 수의 서적들이 선과 악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거나 이 둘의 궁극이 같은 레벨에 속한다는 주장이나 생각은 유사 이래 인류가 목도해온 악의 횡행에 대한 한탄과 좌절감인 탓이 클 것이라 여겨진다. 하지만 결코 놓쳐서는 안 될 것은 문제의 일부만을 보는 시각이다. 문제를 제대로 알려면 근본 원인부터 파악해야 한다는데 이견은 없을 것이다. 우리의 좁은 시각의 시계(視界)를 확장할 필요가 있다.

 

논리적으로 선과 악의 개념을 설정하기 전, 선과 악의 기준을 정할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가에 대한 답을 얻어야 한다. 이에 대한 배경지식을 제공하는 것은 역시 성경이다. 그 중에서도 창세기 3:1-5을 꼽을 수 있다.

 

[창세기]는 우주창조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되는데, 세상의 주요 종교들의 경전 중에서 유독 성서만이 하느님께서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서 창조하셨다는 점을 알리고 있다. [창세기]란 말은 히브리어 단어 창조하다로 번역되는 단어의 여러 가지 의미 중 하나다. 성경전서 중 [창세기] 외 다른 책들에서도 여러 번 하느님을 우주의 창조주라고 표현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이사야40장이다. 그 책엔 별들이 총총한 하늘에 있는 창조물 가운데 전시된 그분의 위대하신 능력과 지혜를 통해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을 바라보며 우리를 격려하는 내용이 소개된다. -이사야 45:12, 18; 사도행전 14:15; 17:24; 요한계시록 10:6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는 전능한 하느님이자 창조주로서 우주의 정당한 주권자이심을 알 수 있다.(역대기상 29:11; 사도행전 4:24; 요한계시록 4:11) 다시 말해, 모든 것을 창조하셨으므로 그분께는 영적 피조물과 인간을 다스릴 권리가 마땅히 있으시다. 그분은 입법자이자 재판관이시고 주권자로서 선과 악의 기준을 정할 권리 또한 가지신다. “여호와라 이름 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시편 83:18)이신 것이다.

 

이제 다시 서두에 언급한 성구 창세기 3:1-5로 돌아가 보자.

 

말하는 뱀의 배후인 사탄 마귀는 이브(하와)를 꾀는 말을 통해 여호와의 주권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때부터 하와 안에서는 하느님의 법이 의롭다는 것에 대한 의문이 싹터 올라 결국 부당한 욕망이 꿈틀대게 되고, 하와는 자신의 주권자이신 여호와 하느님께 당연히 속한 것, 피조물에게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결정하는 하느님의 능력과 권한을 탐내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하와는 말하는 뱀의 꼬임을 선택해 하느님이 법으로 금하신 열매를 먹었고 그리하여 자신의 마음과 정신 속에 죄가 생겼음을 드러냈다. -창세기 3:6; 야고보서 1:14,15; 마태복음 5:27,28

 

이렇게 첫 인간부부에게 죄가 들어오기 전에 죄가 최초로 시작된 곳은 짐작할 수 있는 바와 같이 말하는 뱀의 배후였던 천사가 있던 영계였다. 알려지지 않은 기간 동안 우주에는 하느님과의 온전한 조화가 편만해있었는데, 그 조화를 훼방한 자가 바로 대항자, 적대자(히브리어로는 사탄, 그리스어로는 사타나스 욥기 1:6; 로마서 16:20), 하느님의 주된 거짓 고발자 혹은 중상자(그리스어로는 디아블로스)라고 불리는 영적 피조물인 천사였다.(히브리서 2:14; 요한계시록 12:9) 이런 이유로 사도 요한은 요한13:8에서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고 기록한 것이다. 요한이 여기서 처음부터라고 한 것은 사탄이 반대하는 행보를 시작한 때를 의미한다. 이는 요한12:7; 3:11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제자로서의 행로를 시작한 때를 역시 처음부터라고 표현한 것과 동일하다.

 

하느님께서는 에덴에서 단 한그루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을 금하는 것으로 입법하시므로 그 열매를 먹는 것이 상징적 의미를 지니게 하셨는데, 그 열매를 먹는 행위는 인간에게 무엇이 이고 무엇이 인지를 스스로 결정하게 해주는 지식에 이르게 된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게 하신 것이다.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입법하신 내용과 일치하게, 그리고 나머지 우주가족의 유익을 위해서리도 첫 인간부부의 죄의 행로를 묵인하실 수 없었는데, 그분은 인간피조물이든 반역자가 된 영적피조물인 묵인하시지 않고 그들 모두에게 온당하게도 사형을 언도하셨다. 그 재판장의 형 집행으로 인간부부는 하느님의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다.-창세기 3:14-24

 

이렇게 아담과 하와가 범법하여 그들에게 사망이 선고되게 하심으로 하느님의 공의는 입법자이자 재판관이요 주권자로서 일관성 있게 행사된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그들이 에덴동산 밖에서 일정기간 살도록 허용하심으로써 아직 태어나지 않은 그들의 후손들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생명을 얻을 기회를 주셨다.

 

반면에, 하느님의 주권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한 말하는 뱀 사탄은 아무 것도 창조하지 않았고, 따라서 그에게는 우주통치권을 주장할 자격이 일절 없었다. 따라서 사탄과 첫 인간부부가 여호와의 주권에 도전하고 반역한 것은 그야말로 주제넘고 교만한 행동이었다. (예레미야 10:23) 물론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서 하느님께 반역하는 길을 선택했지만,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라는 선물을 참으로 잘못 사용한 결과였다.

 

사탄은 여호와의 주권에 결함이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모든 일이 공의롭게 처리되는 세상을 만들지 못하고 오늘날의 속수무책인 세상을 만들어 세상을 헝클어놓았다.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은 내전과 국제적 분쟁을 해결할 방법을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다. 성서는 온 세상이 악안 자의 권세 안에 있다고 알려준다. (요한복음 12:31; 요한15:19) 세계 평화를 이룰 지혜를 갖고 계신 분은 오직 여호와뿐이시다. (이사야 2:3,4; 54:13)

 

성경을 읽고 공부하다보면 여호와께서는 사랑에 찬 방식으로 권위를 행사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여호와의 방식을 본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생애의 기록과 사도 바울의 행로를 통해 알 수 있는데, 바로 사람들의 마음에 호소하는 방식이다. 이로써 우리를 얼마나 품위 있게 대해주시지 깨닫게 된다. (욥기 38~41장 로마서 12:1 에베소서 4:1 빌레몬서 8-10)

 

자유의지라는 탁월한 선물

 

굳이 나에게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했던 페트릭 헨리의 말을 빌려오지 않더라도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자신의 삶이 완전히 남에게 지배받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방법 때문이다. 성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알려주는데, 그분 자신의 특성 중 하나는 자유의지다.(창세기 1:26; 신명기 7:6) 그분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들에게도 똑같이 놀라운 특성자유의지라는 선물을 주셨다. 우리가 압제적인 통치자에게 속박될 때 좌절감을 갖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그것이다. 여호와는 단지 우리를 몸과 뇌를 가진 존재로 만드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를 당신의 형상대로 즉, 특별한 정신적 감정적 특성(주된 부분은 자유의지)을 지니도록 창조하신 것이다. 바로 우리 자신의 구성의 일부로서 자유의지를 주셨다.

 

자유의지라는 선물과 더불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생각하고, 사물을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고,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별하는 능력 또한 주셨다.(히브리서 5:14) 따라서 자유의지는 지성 있는 선택에 근거를 두어야 했다. 우리의 경탄스러운 뇌는 선택의 자유와 조화를 이루어 작용하도록 정교하게 설계된 것이다.

 

한계 내에서의 자유

 

서두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여호와 하느님은 전능한 분, 우주 주권을 가진 통치자, 만물의 창조주이시므로 그분만이 절대적인, 무제한의 자유를 가지고 계신다.(창세기 17:1; 예레미야 10:7, 10; 다니엘 4:34, 35; 요한계시록 4:11) 그 밖의 모든 피조물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능력의 한계 안에서 움직이고 행동하며, 그분의 보편적인 법에 복종해야 한다.(이사야 45:9; 로마서 9:20.21) 예를 들어, 중력에 대하여 그리고 화학반응, 태양의 영향, 성장 등을 지배하는 여러 법칙에 대하여 생각해볼 수 있다. 또한 양심고 같은 도덕법도 있고, 타인의 권리와 행동도 사람의 자유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이 누리는 자유는 상대적인 자유다.

 

하나님의 선물인 자유의지도 마찬가지다. 한계 없는 자유는 사회를 무법지대로 만든다. 인간의 행동을 인도할 법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알려준다. “여러분은 자유인답게 사십시오. 그러나 악을 행하는 구실로 자유를 남용해서는 안 됩니다.”(베드로전서 2:16공동번역) 하느님께서는 공동의 유익을 위해 자유의지를 규제하기를 원하신다. 그분의 목적은 우리가 전체적 자유가 아니라 상대적 자유를 누리는 것, 법의 규범을 따르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 행동에 관한 하느님의 법에 복종할 때 가장 행복하도록 설계되고 창조되었다. 그것은 하느님의 물리법칙에 복종하는 것과 비슷하다. 예를 들어, 만일 우리가 중력의 법을 무시하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면, 다치거나 죽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몸 안의 법을 무시하고 음식을 먹지 않거나 물을 마시지 않거나 공기를 호흡하지 않는다면, 역시 죽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자유의지 즉 스스로 결정하는 능력을 주심으로 우리를 존중해주신다. 따라서 우리가 하는 일은 하느님이나 운명에 의해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담과 하와의 후손인 우리가 불순종한 부모에게서 불완전성과 죽음을 물려받았지만 자유의지를 행사할 수 있는 권리는 그대로 가지고 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대하신 일을 보면 그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는데.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종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분의 특별한 재산이 되는 특권을 받아들일지 거부할지 선택할 기회를 주셨다.(출애굽기 19:3-6) 그들은 자신들의 자유의지에 따라 하느님의 이름을 지니는 백성이 되기 위한 조건을 이행하기로 결정했으며, 다 함께 이렇게 선언했다.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출애굽기 19:8) 아쉽게도 이스라엘 민족은 결국 선택의 자유를 잘못 사용하여 그 약속을 어기고 말았지만, 이 예는 우리에게 경고가 되어야 한다.

 

그냥 편하게, 왜 옳은 일만 하도록 사람들을 만들지 않으셨는가? 처음부터 아담과 하와가 반역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창조하셨다면 이 모든 고통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한 번 생각해보자. 역사 전반에 걸쳐 정부들은 언제나 사람들이 그 정부의 사고방식에 따르게 하려고 했다. 그래서 어떤 정부들이나 몇몇 통치자들은 여러 가지 수단을 사용하여, 어쩌면 약품이나 수술을 통해서까지 사람들을 세뇌시켜 그들에게서 자유의지라는 이 놀라운 능력을 빼앗았다. 이에 대해 우리가 분노하는 이유는 자유도덕행위자로서 자유의지를 행사하는 것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 아닌가? 그게 아니면 그러한 자유를 빼앗으려는 정부나 통치자의 시도를 기꺼이 용납할 것인가?

 

이해를 돕기 위한 예로서, 교통법규를 들 수 있다. 교통법규라는 한계 내에서 자유롭게 질서 있는 운행을 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인간을 한계 내에서 자유의지를 가지고 살도록 하신 것을 이해하는데 간편 도형도 정도는 될 수 있는 예다. 법규를 무시하면 사고를 유발하여 생명을 잃을 위험에 처할 수 있다. 아무도 자신만의 표준에 맞춘 신호등을 휴대하고 다니길 원하지 않는 바와 같다.

 

다른 예로, 목숨을 걸고 쟁취한 선거권으로 투표를 하는데 누군가 와서 당사자가 결정하고 선택하려는 후보자가 아닌 다른 이에게 억지로 투표하게 한다면 그에게 온전한 자유와 자유의지를 보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여호와께서는 다시금 강조하지만 위에서 여러 차례 살펴본 바처럼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으므로 우리의 마음을 강제로 열려고 하지 않으신다. (신명기 30:19,20) 그 대신 그분은 이 세상에 사는 수십억에 달하는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면서 그분을 섬기려는 마음을 가진 이들을 찾고 계신다. (역대기상 28:9) 그리고 그런 사람을 발견하면 감동적인 방법으로 행동하시고 이끄실 뿐이다.

 

무고한 사람들에게 재난이 닥치는 이유

 

이 즈음 되면 이에 대한 답은 위에서 거의 찾았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생기는 질문은 한 가지. 그렇다면 왜 그토록 오래 걸리는가?’ 이다. 그 전에 먼저 정리하고 넘어가보자.

 

성경은 하느님이 고난을 일으키시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알려준다. 일례로 성경은 우리가 시련을 당할 때 하느님께 시험을 받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이유가 무엇인가?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야고보서 1:13) 다시 말해 하느님은 결코 우리가 겪는 고난이나 그에 따르는 고통의 원인이 아니시다. “하느님께서는 악하게 행하시는 분이 아니시다.-욥기34:12

 

인류가 고난을 당하는 이유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말하는 뱀의 배후이자 하늘의 영계에서 스스로 창조주 여호와께 마땅히 돌아가야 할 숭배를 탐낸 사탄마귀가 된 천사의 유혹에 넘어간 첫 여자 하와와 그에 동조한 아담이 반역을 선택함으로 발생한 죄로 인한 결함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첫 인간부부의 후손인 우리는 그렇게 결함으로 불완전한 다른 인간들 때문에 종종 피해를 입는다.(전도서 8:9) 그에 더해 예기치 못한 일때문에, 즉 단순히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곳에 있기 때문에 재난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전도서 9:11) 하지만 인간이 겪는 모든 고난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이 이 세상의 통치자인 사탄 마귀에게 있다고 성경은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온 세상은 악한 자의 지배 아래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요한복음 12:31; 요한15:19) 따라서 인간에게 고난을 가져오는 자는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가지만, 사탄이지 하느님이 아니시다.

 

하느님은 우리가 겪는 고난을 아신다.

 

인류가 고난을 당하기 시작한 이래로 여호와께서는 사람들이 흘린 눈물 한 방울 한 방울을 눈여겨보셨다. 그분은 예리한 눈으로 모든 것을 살피신다.(시편 11:4; 56:8) 예를 들어,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압제를 당할 때 그분은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분명히 보았다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그들의 고통에 대해 단지 어렴풋하게 알고 계셨을까? 아니다. 이어서 그분은 그들이 겪는 고통을 내가 잘 알고 있다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3:7) 그때처럼 분명 하느님은 우리가 겪는 고난을 속속들이 아신다. 다른 사람은 알아채지 못하거나 제대로 이해해주지 못한다 해도 그분만은 알고 계신다.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큰 위로를 얻는 근거와 이유다.-시편 31:7; 잠언 14:10

 

하느님은 우리가 고난을 겪을 때 함께 고통스러워하신다.

 

여호와 하느님은 인류가 겪는 고난을 알고 계실 뿐 아니라 몹시 마음 아파하신다. 예로서 고대이스라엘 백성이 고난을 당할 때 그분은 마음속 깊이 괴로움을 느끼셨다고- “그들이 온갖 고통을 당할 때에 그분도 고통스러워하셨다고 성경은 알려주기 때문이다.(이사야 63:9) 하느님은 인간보다 훨씬 더 우월하신 분이지만, 사람들이 겪는 고난을 이해하시고 당신의 마음으로 그들의 고통을 느끼신다! 참으로 여호와는 동정심이 매우 많으시고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야고보서 5:11 신세계역 각주) 그에 더해 여호와께서는 우리가 고난을 인내할 수 있게 도와주신다.-빌립보서 4:12,13

 

하느님은 인간이 겪는 고난을 모두 없애실 것이다.

 

성경에서는 하느님이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의 고난을 없애실 것을 알려준다. 여호와께서는 에덴에서의 반역 직후 이를 바로잡기 위해 마련하신 하늘왕국을 사용해 인간이 처한 비참한 상황을 완전히 바꾸실 것이다. 그때에 관해 성경은 요한계시록 21:4에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더 이상 죽음이 없고, 슬픔과 부르짖음과 고통도 더는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린 것이다.”고 약속하신다. 그렇다면 이미 죽은 사람은 어떻게 될까? 불타는 지옥이나 천당이 아니라, 이 땅으로 부활시켜 그들 역시 고난이 사라진 세상에서 삶을 즐기게 해주실 것이다. (요한복음 5:28,29) 과거 트라우마가 될 만큼 가슴 아픈 기억이 떠올라 괴로워하는 사람은 어떨까? 여호와의 약속은 이와 같다. “이전 것들은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을 것이다.”-이사야 65:17

 

이쯤해서 손이라도 들고 나서고 싶은 분들 계실 것이다. “다 좋아요, 알겠어요. 그런데 왜 이렇게 그 약속의 성취가 오래 걸리냐고요?’ 물으시는 분들 말이다.

 

이에 대한 이해를 돕는 훌륭한 예가 있다. 수학 강의를 하고 있는 교사에게 어느 학생이 선생님이 문제를 푸는 방식에 문제가 있고, 선생님이 문제를 푸는 오류가 있는 방식 때문에 수능점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주장하는 학생이 있다면, 교사로서 할 일은 무엇일까? 그렇다. 그 학생이 교단으로 나와 교실의 학생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그 문제를 학생으로 하여금 직접 풀게 함으로 그가 제기한 의문을 해소하도록 하는 것뿐이다.

 

여기서 교사가 결코 해서는 안 될 일 두 가지가 있다.

 

1. 교사는 이 반항적인 학생이 자신의 방법을 설명하는 것을 중단시켜서는 안 된다.

2. 교사는 이 반항적인 학생이 자기주장을 펼치도록 도와주어서도 안 된다.

 

마찬가지다. 여호와께서도 두 가지 일을 하지 않기로 하셨다.

 

1, 그분은 사탄과 그의 편을 든 자이 자기이 옳음을 증명하려고 시도하는 것을 중단시키지 않으셨다. 따라서 시간이 흐르도록 허용할 필요가 있었다. 수천 년의 인간 역사에서 인류는 온갖 종류의 정부형태를 시도하면서 스스로를 다스려 보았다. 인류는 과학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상당한 발전을 하였지만 불공정과 가난과 범죄와 전쟁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인간의 통치는 이제 처참하게 실패했음이 증명되었다.

 

2, 여호와께서는 사탄이 이 세상을 통치하는 것을 도와주지 않으셨다. 가령 하느님께서 끔찍한 범죄이 일어나는 것을 막아주신다면 반역자의 주장을 뒷받침해 주시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인간이 어쩌면 비참한 결과를 피해가면서 스스로를 다스리는 것이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만드시는 것이 될 테니 말이다. 여호와께서 그렇게 하신다면 되려 사탄의 거짓말에 동조하시는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거짓말하실 수 없으시다.-히브리서 6:18

 

여호와께서는 이 모든 과정에서 최상의 결과를 산출할 수 있는 시점에 즉, 가장 적절한 때에 개입하실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이와 관련해 이렇게 격려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베드로후서 3:8,9

 

​◉ 조물주께서 아들 예수를 통해 마련하신 회복

 

베드로의 기록처럼 머지않아 하느님께서는 첫 인간 창조물이 반역하기 전에 의도하셨던 대로 모든 것을 회복시키실 것이다. 인간이 독립적으로 통치하도록 하느님께서 지정하신 기간은 거의 끝나 가고 있다.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왕국의 왕으로 임명하셨고 그 왕국은 이미 통치를 개시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포스팅 [나라이 임하옵시며-마태복음 6:10 https://blog.naver.com/genie7080/222690342332 ]참조) *P.S: 이 포스팅을 작성하는데 상당부분 https://www.jw.org/ko/ 를 참조했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 하느님의 적을 모두 없애실 것인데(데살로니가후서 1:6-10)이것은 인간 독재자들이 내리는 것과 같은 즉결 처분이 아니다. 인간의 잘못된 통치가 파멸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증명하는 산더미 같은 증거들은, 하느님께서 머지않아 무한한 권능을 사용하여 자신의 뜻을 강제로 시행하시는 것이 온전히 정당함을 보여 줄 것이다.(요한계시록 11:17,18) 그렇게 권능을 사용하시는 것이 처음에는 땅에서는 결코 경험해 본 적이 없는 환난으로 노아 시대의 홍수와 비슷하지만 그보다 훨씬 큰 환난이 될 것이다.(마태복음 24:21,29-31, 36-39) 큰 환난을 생존하는 사람들은 상쾌하게 하는 시기를 경험하게 될 것이며, 그 때 그들은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하신 하느님의 모든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사도행전 3:19 요한계시록 7:14-17)

 

하느님께서는 무엇을 약속하셨나? 일부만 열거하자면 아래와 같다.

 

1) 전쟁과 피 흘리는 일로 인한 고난이 끝날 것이다. -시편 46:9 이사야 2:4

2) 범죄와 불공정으로 인한 고난이 끝날 것이다. -잠언 2:21,22 시편 37:10,38 ; 미가4:4

3) 신체적인 병과 감정적인 병으로 인한 고난도 끝나게 될 것이다-이사야 33:24; 35:5,6

4) 죽음이 가져오는 결과까지도 역전시키실 것인데 예수께서는 기념 무덤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음성을 듣고 나올것이라고 예언하셨다.-요한복음 5:28,29

5) 사도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하느님의 새로운 통치권과 의로운 인류사회)”에 관한 환상 가운데서, 이러한 말을 들었다. “하느님께서는 친히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죽음이 없고, 애통과 부르짖음과 고통도 더는 없을 것이다.”-요한계시록 21:1-4

 

앞에서 예로 든 교실에서 어떤 근거도 없이 교사를 중상 모략하던 학생에게 문제 푸는 시간이 허락된 것과 같은 - 악이 일시적으로 허용되는 기간 동안 일어났던 비극적인 일들은- 뛰어난 교사의 해법을 통해 답을 얻을 수 있듯이, 우리 모두는 치유의 혜택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로써 인간이 겪었던하느님의 목적에 결코 포함되지 않았던고통과 고난에 대한 기억조차 완전히 지워질 것이다.(이사야 65:16,17) 완전한 인간 가족이 지상낙원에서 온전히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게 할 하느님의 원래 목적이 온전히 실현될 것이다.(이사야 45:18) 이때 그분의 주권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인 것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고난을 모두 끝내실 때 사는 우리는 참으로 큰 특권이다! 그때가 되면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니체가 비난한 것처럼 폭군, 사기꾼, 협잡꾼, 사형 집행인과 같은 분이 아니라 절대적인 권능을 행사하시면서도 항상 사랑이 많으시고 지혜로우시고 공정하신 분임을 나타내실 것이다!

 

포스팅을 마치며 서론에서 차용해왔던 작가의 말에서 [쿠아란타리아]에 대한 나의 결론은, 증상의 원인도 모르면서 너무 아파서, 정말 너무 아파서환자 스스로가 만든 자가 처방전이라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썩어문드러져 가도록 증상을 자각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와 같은 자각은 병을 치료하고 명의를 찾을 수 있는 단초가 된다는 점에서 이 책의 가치를 매길 수 있을 것이다.